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 침공 (문단 편집) ==== 국경 전투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land1939_GermanPlanMap.jpg]] 개전 당시 폴란드군과 독일군의 배치 및 독일군의 작전도. 보면 알겠지만 폴란드의 [[포즈난]] 군과 포모제 군이 '''국경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 싸먹어 주고 싶을 정도로''' 위태위태한 위치에 있다. 나치 독일은 중부에서의 공격을 자제하고 북쪽과 남쪽에서 양익 포위를 전개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chleswig_Holstein_ostrzeliwuje_Westerplatte_39_09_01_b.jpg|width=100%]]|| ||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포격을 받아 연기에 휩싸인 베스테르플라테 || 9월 1일 새벽 4시 45분, 친선우호를 목적으로 [[그단스크]]에 기항한 독일 해군의 전(前) 드레드노트급 [[도이칠란트급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당시 독일 해군에는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슐레지엔이 있긴 했지만, 시대상 이들이 활동하기엔 너무 구형이었다. 이후엔 일선에 투입되지 않고 기뢰를 부설하는 업무에 종사하다 패전이 임박하자 비로소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자매들처럼]] 자침되었다.]이 그단스크에 있는 폴란드 [[요새]]를 11인치 [[주포]]로 기습 포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2차 대전의 개막을 알린 예포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뒤이어 독일군은 베스테르플라테에 상륙했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군의 [[https://en.wikipedia.org/wiki/Wojciech_Najsarek|보이치에흐 나이사레크]](Wojciech Najsarek) [[하사]]가 독일군의 [[기관총]]을 맞아 절명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첫 번째 전사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폴란드 북부 해안 지역을 공격하기 직전인 새벽 4시 40분, 독일 공군은 폴란드 도시 비엘룬(Wieluń)에 기습적으로 공습을 감행, 도시의 75%를 파괴하고 시민 1,200여 명을 [[학살]]했다. [[파일:1939GdanskPostOffice.jpg]] 그단스크 우체국을 공격하는 [[슈츠슈타펠|무장친위대]]. 사진 속의 장갑차는 [[오스트리아]]제 [[ADGZ]] 장갑차. 한편 그단스크에서는 폴란드 [[우체국]]에 모여 있던 콘라트 구데르스키(Konrad Guderski) 휘하 우체국 직원과 민간인 55명, 철도청 직원 1명이 수백여 명에 이르는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독일군과 독일계 반란군을 상대로 항전]]했지만 결국 15시간의 전투 끝에 중과부적으로 패배, 구데르스키를 포함한 8명은 전사하거나 항복 후 독일군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하고 4명은 부상 악화로 사망, 포로로 잡힌 38명은 처형, 4명은 탈출하여 도망쳤다. 이 4명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오늘날 그단스크 우체국에서의 항전은 폴란드인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적에게 맞서 싸운 전설로 남아있으며, [[1995년]] 독일의 [[뤼베크]] 지방 법원은 처형당한 38명에 대한 재심을 실시, 당시 독일 군사 법정이 그단스크에 살던 38명을 재판할 권한이 없었다고 판결하면서 처형당한 이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상기했듯 독일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폴란드에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 당장 영화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브와디스와프 슈필만(Władysław Szpilman)의 동명의 회고록에서도 바르샤바의 신문 판매원이 '''독일이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공격했다'''고 열을 내며 길길이 날뛰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기습적인 포격을 당한 베스테르플라테(Westerplatte)의 수비대는 8월 말에 80명에서 증원된 2백여 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3천4백여 명의 독일군을 상대로 4백여 명에 이르는 피해를 입히며 '''9월 7일'''까지 버텼다. 북부 해안 지역에서 폴란드군의 조직적 저항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헬(Hel) 반도의 폴란드군이 항복한 10월 2일에 이르러서였다. 북부 해안 일대에 대한 포격과 더불어 독일군은 당초 계획한 대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휘하 남부집단군을 중심으로 남부 전선 전역에 걸쳐 대규모 파상 공세를 개시했다. 여기에 비엘룬 [[공습]]을 시작으로 독일의 [[급강하폭격기]] 부대들이 항공지원에 나섰고, 그 직후 독일 남부집단군 소속 2개 기갑사단과 1개 보병사단이 오전 8시 폴란드 국경을 넘어 모크라(Mokra)로 진격했다. 전투 첫날 해당 국경선을 방어하던 폴란드 제7보병사단과 [[장갑열차]] 시미아위(Śmiały), 보윈 기병여단(Wołyńska Brygada Kawalerii)이 모크라를 공격해 온 독일군을 격퇴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폴란드 남부의 방어선은 장비와 병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허술한 상태였다. 프시치나(Pszczyna)에서는 4일까지 베르나르트 몬트 준장의 폴란드 제6보병사단이 [[https://en.wikipedia.org/wiki/Heinrich_von_Vietinghoff|하인리히 폰 비팅호프]](Heinrich Gottfried Otto Richard von Vietinghoff genannt Scheel)의 독일 제5기갑사단과 SS 게르마니아 연대를 맞아 싸웠지만 결국 패배했으며, 벵기에르스카 구르카(Węgierska Górka)의 폴란드군 또한 독일군에 피해를 입히며 선전했으나 거의 15배에 이르는 독일군의 숫적 우세에 밀려 패배했다. 미코우프(Mikołów)에서는 독일 제8보병사단과 제28보병사단, 제5기갑사단이 폴란드 제55보병사단을 박살내고 진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남부 방어선은 계속 이어지는 독일군의 거센 공세를 견디지 못해 얼마 안 가 붕괴되고 말았다. 원래 폴란드군은 독일의 주공 방향이 남부 지역이 될 것으로 파악하고 해당 지역에 병력을 집중시켰지만, 독일군의 진격 페이스를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정도로 생각하고 동원도 다 끝내지 못한 상태였기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한 것. 그 와중에 서남부 국경 지역을 방어하던 다른 폴란드 야전군인 포즈난 군과 크라쿠프 군은 우치 군이 독일 제8군과 제10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밀려나는데도 제대로 협조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포즈난 군은 독일의 양익포위를 피하기에 바빴고 크라쿠프 군도 제자리를 지키는 데에 여념이 없었으니... [[페도어 폰 보크]] 휘하의 북부집단군도 뒤이어 북쪽 국경 지대에서 전 전선에 걸쳐 총공세를 개시하였고 폴란드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9월 1일 므와바(Mława)에서 에밀 크루코비치프셰지미르스키(Emil Krukowicz-Przedrzymirski)[* 에밀 카롤 프셰지미르스키 데 크루코비치(Emil Karol Przedrzymirski de Krukowicz)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소장이 이끄는 모들린 군 소속 제 8보병사단과 제 20보병사단은 [[게오르크 폰 퀴힐러]](Georg von Küchler)의 제3군 소속 5개 보병사단과 1개 기갑사단으로 구성된 독일군에 맞서 1,200여 명 전사 및 1,500여 명 부상의 피해를 입는 동안 독일군에게 2,800여 명 전사 및 실종, 3,000여 명 부상의 피해를 입히고 전차 72대를 파괴하는 등 선전했지만 독일 공군의 롤러식 폭격과 계속되는 독일군의 공세로 큰 피해를 입고 3일 만에 퇴각하여 비스와강과 나레프강에 걸친 제2방어선으로 후퇴했다. 폴란드 북서 지역의 폴란드 회랑(Korytarz Polski)을 방어하던 포모제 군 소속 제9보병사단과 제27보병사단, 체르스크 작전 집단도 서부 국경 지대에서 [[귄터 폰 클루게]]와 [[하인츠 구데리안]]의 독일 제2군단과 제19기갑군단의 공격을 받아 5일까지 투홀라(Tuchola) 숲 전투에서 독일군의 압도적인 기갑 전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투홀라 숲 전투에서 2,350명의 폴란드군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독일군의 피해는 1,249명이었다. 그중 제19기갑군단의 피해는 850명이었다. 제9보병사단은 독일군의 포위망 속에서 붕괴했으며, 포모제 군은 서부 국경과 동프로이센 양쪽에서 협공을 받아 퇴각했다. 포모제 군은 투홀라 숲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큰 손실을 입었으며, 그 피해는 전체 병력의 1/3에 달했다. 특히 제9보병사단의 잔존 병력은 30%에 불과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 전선에 걸쳐 [[루프트바페]]의 맹폭이 개시되었다. 이 공격으로 인해 폴란드의 지상군은 전투 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는데 돌파한 독일군을 저지하는 것 자체가 지장을 받은 데다가 통신이 끊어지고 후방에 있는 보급·통신·지휘 체계가 집중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독일군은 폴란드 군사 시설뿐만 아니라 병원, 묘지, 심지어 피난민 열차에까지 공습을 가했다. 거기에 피난민까지 도로에 몰리는 등의 사태가 겹쳐 사실상 이때부터 폴란드군은 각자 알아서 전투하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으며, 통합지휘 따위는 물 건너가게 된다. 이 정도로 폴란드군의 전투 의지가 상실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원래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없는 불리한 처지에 놓인 것은 사실이었다. 이외에도 폴란드 정부는 개전 전에 독일의 모든 공격을 격퇴할 수 있다고 선전했는데, 전쟁 발발 이후에는 독일군의 빠른 진격과 무차별 폭격, 점령지 내의 독일군의 잔혹 행위에 충격받은 폴란드 피난민들이 도보로 이동하면서 폴란드군 진격의 장애물이 되었다.[* 이런 모습은 [[프랑스 침공]]에서도 프랑스 피난민들에 의해 재현된다.] 하지만 폴란드 공군이 손가락만 빨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흔히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기량도 우수해진 파일럿과 [[Bf109]] 등 신형 전투기로 무장한 독일 공군에게 수적으로 불리한 폴란드 공군이 완전히 밀렸으리라고 여겨지며 심지어는 폴란드 공군기들은 이륙도 못해보고 파괴되었다는 루머까지 있으나 이는 사실과 한참 동떨어져 있다. 폴란드 공군은 독일 공군의 신형 전투기인 [[Bf109]]에 비해 한참 뒤쳐지는 전투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숫적으로도 절대적으로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공군기 285기를 손실시키고 279기를 반파시키는 등 분전했다. 예를 들어 전투 첫날 바르샤바의 폴란드 공군 부대는 바르샤바를 [[폭격]]하러 온 독일 공군 부대와 공중전을 벌여 큰 피해를 입히고 쫓아냈다. [[란체스터 법칙]]이 잘 적용되는 공중전에서 질적,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지 않고 분전했다는 것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폴란드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공군은 독일군의 질적, 수적 우세에 밀려 제공권을 상실하고 만다. 2주 동안의 분투 끝에 14일에는 개전 당일에 400기에 이르렀던 폴란드군의 항공기가 54기까지 줄어들었고, 이 시점에 이르러 폴란드 공군은 활동을 중단했다. 아주 활동을 중단한 것은 아니고 그 이후로도 종종 지상군 지원에 나섰지만 17일에 소련이 침공한 이후로는 완전히 무력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전투기 조종사들은 [[영국]]으로 망명하여 훗날 영국에서 벌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9월 3일에는 폴란드 해안 지방이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토의 독일군에 의해 폴란드 본토로부터 차단되었으며 이 날 [[귄터 폰 클루게]]의 제4군은 비스와강에, 퀴힐러의 제3군은 나레프강에 도달했다. 이후 제3군은 12일 나레프강에 형성된 폴란드군의 방어선을 분쇄, 바르샤바 동부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준장]]의 기병대가 이들을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나레프강을 방어하던 [[https://en.wikipedia.org/wiki/Juliusz_Zulauf|율리우시 줄라우프]](Juliusz Zulauf) 준장의 폴란드군은 나레프강으로부터 퇴각, 14일 바르샤바에 도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